별똥별이 된 기분이에요
너무 멀리 와버려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요
이 새로운 세상을
당신과 함께하게 해주세요
민정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이별이 대단한 고난이 될 거라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면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지만, 딱히 식음을 전폐하지도 않았고 시간은 지나치게 잘 흘러갔다. 점심 즈음 눈을 떠서 멀뚱멀뚱 바보처럼 있다 보면 금세 저녁이 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가을학기가 되자 친구들이 바빠져 약속도 싹 없어졌고 혼자 보내는 하루가 점점 늘어갔다. 이때부터는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없어질 정도로 새벽까지 죽도록 영화를 보다가 잠드는 게 민정의 루틴이었다. 그나마 연락이 닿는 건 상훈 정도였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밴드 멤버라는 공통분모로 엮여버렸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부터 안부를 묻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 너 밴드는 버렸냐?
징글징글하게 대학까지 이어진 인연 덕에, 민정은 마침내 상훈의 밴드에 보컬로 합류하게 되었다. 오래 염원했던 밴드 활동은 재미있었다. 노래 실력도 점차 늘었다. 다만 선배와 헤어지고서 연습은 밥 먹듯 빠졌다. 간간히 생존신고를 했던 밴드 단톡방에는 안 읽은 메시지가 300개 넘게 쌓여있었고, 재수강 해야 될 수업들 투성이에, 기타는 여전히 중급 미달 수준. 염색은 다 빠져서 더러워진 투톤 머리까지-
한 마디로 개판이었다.
연락을 가뿐히 무시하자 상훈은 다음 날 아예 집으로 찾아와선 들들 볶아댔다. 왜 단톡방 안 보는데? 다들 너 죽은 줄 알잖아. 귓전에 왱알대는 목소리가 퍽 거슬리길래 이불 속에서 눈도 뜨지 않고서 대답했다. 왜 남의 집에 불쑥 오고 난리야.
"니가 잘하는 짓이잖아. 애들이 하도 궁금해해서 내가 대표로 온 거야."
"살아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됐지. 가."
야. 방 꼬라지 봐라. 상훈이 빈정거리며 엉망이 된 방 안을 미적미적 돌아다녔다. 기타도 내팽개쳐져 있고. 집에서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뭐 하고 살아? 니네 오빠는 여동생이 이러고 사는 거 알고는 있어?
"...나가."
"나한테 더럽다고 뭐라고 하지 말고, 니 방이나 좀 치워."
"귀찮게 하지 말고 가라고."
"김민정 완전... 히키코모리 폐인 됐네?"
히키코모리 폐인. 딱히 부정할 말은 없어서 묵묵부답으로 있었다. 듣기 싫다는 의미로 이불을 아예 머리끝까지 뒤집어쓰자 상훈이 포기한 듯 뒤돌아섰다. 어쨌든, 너 숨 쉬고 있는 거 확인했으니 간다.
침입자를 내쫓자 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민정은 눈을 끔뻑거리며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집안 곳곳에 한 달간 방치해 둔 온갖 우편물과 택배상자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언젠가 밤에 불도 안 켜고 걷다가 상자에 발이 걸려 놀란 적도 있다. 지금은 맨발로 막 차고 다니지만. 아무튼 방구석 꼴이 심각하게 엉망이긴 한가 보다. 더러운 인간한테 청소하라는 말 좀 들을 정도면... 민정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한숨을 푹 쉬고 팔을 걷어붙였다. 히키코모리 폐인에서 적어도 폐인은 좀 떼고 싶어서.
일단 눈앞에 있는 이 정체 모를 상자 먼저 뜯어보자. 옷일까? 그런데 이렇게 큰 옷을 주문한 적이 있었나. 봉투를 성의 없게 찢어내자 까맣게 잊고 있던 물건이 나왔다. 선배와 헤어지기 전에 주문해 놓았던, 무려 50L 짜리 대형 백팩이었다.
"...이건 뜯어놔도 쓰레기잖아."
민정은 자기 몸의 반만 한 백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구석탱이로 다시 치웠다. 또 중요하지 않은 온갖 고지서와 서류들을 보지도 않고 직직 찢어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가장 밑에 깔려있는 소포를 커터칼로 뜯자, 안에 있는 것들까지 같이 찢어진 건지 너덜너덜해진 종잇조각이 툭 튀어나왔다. 그건 큰맘 먹고 선배에게 생일선물로 건넸던 티켓 예매내역과 일정표였다. 그리고 아마도 선배가 쓴 편지- 로 추정되는 작은 봉투도 함께 있었다.
커터칼에 편지 봉투까지 잘리지 않은 게 감사할 일일까. 지금은 이걸 도무지 열어볼 자신이 없었다. 아마 편지지만 있었다면 그대로 내용을 읽어버렸을 것이다. 무려 헤어진 연인이 준 손편지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 만나자는 내용이 아닐까 상상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는 걸 수도. 선물로 줬던 티켓 예매내역을 같이 보낸 걸 보면 그냥 마음 정리일 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나 너랑 헤어지고 남자친구 생겼어. 그때 내 인스타에 댓글 엄청 달아주던 걔 알지? 이런 가벼운 류의 내용일지도...
생각이 물꼬를 트자 괜히 머리만 지끈거렸다. 하지만 선배가 이 편지에 뭐라고 썼든 제가 동요할 것은 분명했다. 민정은 침대에 누운 채 한 때 신나게 계획했던 일정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표를 취소하려면 이 시기가 마지막이다. 지금 취소해야 빡센 환불 수수료가 안 나올 테고.
"오늘 빨리 해버려야지."
정말?
정말로 취소해도 될까? 아니지, 다시 생각해 보자. 그렇다기엔 이 티켓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친 인고의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심지어 여행때문에 휴학도 했는데. 고된 알바를 하면서 몇 개월 일해서 번 돈인데. 비행기며, 배며 얼마나 정성 들여서 찾아보고 예약해 놨는데.
아니, 이것도 아닌가.
이제 와서 북유럽이고 오로라고 무슨 소용이야. 혼자 가서 거기서 뭐 얼마나 재밌게 논다고. 아이슬란드 여행을 제외하면 구체적인 일정은 제대로 짜 놓은 것도 없잖아. 가봤자 기분만 더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해? 수없이 고뇌를 하는 동안에도 방 안의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그때 문득 선배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 갔다. 오로라를 보면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민정이 피식 비웃고 만 한 마디가.
만약 정말로 소원이 이뤄진다면 뭘 빌면 좋을까. 그렇다면 다시는 이렇게 상처뿐인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고, 이 지진부진한 기억을 제발 다 잊어버리게 해 달라고 빌고 싶었다. 봄날의 추억도, 너무 추웠던 졸업식도, 분홍색 꽃을 받은 스무 살의 생일도.
민정은 침대에서 빈둥거리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를 보고 나서 스물한 살의 인생 플랜을 짜기로. 그전까지는 여행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우선 신나는 음악이 필요해.
적절한 노동요를 몇 개 고르고 스피커 볼륨을 키웠다. 그리고는 몇 분 전까지 구석에 처박아뒀던 대형 백팩을 꺼내왔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짐을 싸다 보니, 기분탓인지 진심으로 설레는 것도 같았다. 역시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낫다고.
북유럽은 많이 추울 테니까 털모자랑 목도리를 가져가는 게 좋겠지. 담요도 하나 가져가면 요긴하게 쓸 수도. 오로라를 볼 때 야외에서 캠프를 할 테니까 방한이 잘 되는 패딩도 챙겨 가야겠다. 아이슬란드 투어 일정에는 온천이 있었으니까 수영복도 잊지 말고. 밤하늘 사진을 찍기 위한 카메라에, 비상약도 대충 몇 개 넣고. 신발은 파치먼트 컨버스 하나로 한 달을 버틸 수 있으려나? 혹시 모르니까 너무 구질구질한 옷만 가져가지 말고 세미 정장이나 구두도 하나 넣을까. 딱히 입을 일은 없을 것 같다만, 아무튼.
어느새 홀쭉했던 가방은 배불뚝이 마냥 크게 부풀어 있었다. 짐을 대충 싸놓고 민정은 은행에 들러 유로화를 비롯해 온갖 종류의 북유럽 화폐들을 조금씩 환전했다. 그리고 나간 김에 아예 미용실까지 들러서 뿌리염색도 다시 했다. 드라이를 마치자 말끔해진 머리가 찰랑거리는 게 아주 기분이 산뜻했다. 그래. 보여줄 사람은 없어도 폐인 몰골로 휘적휘적 다닐 순 없지.
노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집에 들어오자마자, 새삼 잘 정리된 백팩 하나가 고스란히 놓여있는 모습에 스스로 감탄이 나왔다. 인간의 의지력이란 정말 놀랍다. 아침에는 잡동사니와 택배상자들로 가득했던 방이었는데, 여행 가겠다 결심을 한 지 불과 반나절도 안 되서 마무리 단계라니.
하지만 지갑을 정리하던 민정은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발견하고 다시금 우울해졌다. 지갑 안에는 선배와 함께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들어있었다. 제주도에 가지 못하고 선배가 사준 저녁을 먹은 날- 그러니까 올해 1월 1일, 제 스무 살 생일에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구질구질한 미련이었을지, 애정의 잔재였을지, 아니면 단순히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추억이었기 때문인지.
어쨌든 민정은 결국 여행 전날까지 그 사진을 지갑에서 빼지 못했다.
Rewind : Airport
미끄러운 바닥에 캐리어가 끌리는 소리. 알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이착륙 일정을 꾸준히 알리는 새파란 전광판. 출발이라는 글자와 함께 그려진 흰색 화살표. 민정은 공항 특유의 활기와 들뜬 분위기가 좋았다. 아마도 여행 차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통으로 느낄 만한 감상일 것이다. 이별로 그렇게 마음이 피폐해지고도, 시끌벅적한 라운지에 도착하니 간만에 리프레쉬가 되는 느낌이었다.
다만 사람들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민정의 옆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등산객들이나 멜 법한, 이불까지도 충분히 들어가는 커다란 백팩을 메고 출국 심사를 기다리는 민정은 영락없이 가출 청소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서 있었지만.
-12시 40분 **항공 헬싱키행 탑승자는 24번 게이트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탑승 게이트 근처에 다다르자 마침 기다리던 안내방송이 나왔다. 전면 유리창 밖에는 화창한 햇볕을 쬐고 있는 대형 항공기가 보였다.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보채는 건너편 좌석의 부부. 면세점에서 산 봉투를 한 아름 들고 분주하게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 앳된 커플. 그리고 그 옆에 민정이 알콩달콩할 사람 하나 없이,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었다.
시간이 널널하다 못해 넘치는 휴학생이자, 4년간의 을의 연애를 어렵사리 끝낸 비련의 솔로. 그리고 일 년치 알바비를 모두 쏟아부어 두 달치 북유럽 국가들을 순회하는 비행기 티켓을 손에 거머쥔 여행객. 그게 지금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기어코 가긴 가는구나."
김민정이 유럽에 가긴 간다. 폐인 생활만 청산하려다가 영종도까지 와버렸다. 민정은 이 여행이 끝나면 인생이 조금 바뀌어 있을 거라고 직감했다.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탑승이 시작하자마자 곧장 앞줄에 섰다. 골치 아프게 큰 짐 때문에라도 빨리 앉아서 정리를 해야 했으니까. 곧 빈 좌석들이 몰려드는 사람들로 꽉꽉 채워지기 시작했다. 출발 직전까지도 옆자리가 텅 비워진 채 있길래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아싸. 혼자서 다리 쭉 뻗고 편하게 가겠다. 다만 들뜬 마음으로 기다려도 비행기는 움직일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출발시간이 30분이 넘게 지체되자 여기저기 한숨 소리가 나왔다. 그때, 이 모든 지연의 주인공이 분명한- 한 여자가 모두의 눈총을 받으며 헐레벌떡 들어왔다.
발소리가 점점 이쪽으로 다가왔다. 살짝 컬이 들어간 긴 머리에 청자켓. 막 영화를 고르던 참이어서 얼굴은 잘 보지 못했다. 달리기를 마치고 온 계주선수마냥 숨을 몰아쉬던 여자는, 자켓을 훌쩍 벗어 짐칸에 올려놓았다.
"죄송해요, 좀 들어갈게요."
그리고는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빈 창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묵직한 워커가 발가락 위를 자근자근 밟고 지나갔다. 난데없는 통증에 민정이 코끝을 찡그리며 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인생 최초 장거리 비행인데 옆에 꽤 골치 아픈 사람이 앉았구나 싶어서.
진짜 운도 없지.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의 첫인상이었다. 여자는 더위가 식지 않은 듯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며 머리를 쓸어넘겼고, 이내 민정의 코끝에 닿은 진한 향기가 닿았다. 분명 선배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시점부터 쓰기 시작한 은은한 우디 향. 그와 너무나 비슷한 내음에 반사적으로 머리가 굳어졌다.
향기는 과거의 기억을 훨씬 잘 불러일으킨다고 했던가. 겨우 찰나의 순간으로 아득히 멀어졌던 추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비행기 티켓을 선물로 주었을 때 기뻐하던 눈웃음짓는 표정. 축제 전날 밀크쉐이크를 사 들고 학교를 찾아갔을 때 놀라던 웃는 얼굴. 사귈까, 우리? 하고 뻔뻔하게 말하던 땀에 젖은 모습같은,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이.
정말 웃길 따름이다. 왜 사람의 뇌는 가장 기억하고 싶은 이미지만 선별해서 가져오는 걸까. 그렇게 아쉽고 미웠던 기억들은 다 어디로 가고, 오랜 향기에는 그리움만 가득했다.
-...착석하여 좌석벨트를 매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여행 중에는 이런 생각하지 말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민정이 벨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어쩐지 벨트 끈이 이상할 정도로 짧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래서 안간힘을 쓰고 끈을 몇 번 쭉쭉 당겨봤다. 어디 꼈나? 물론 그것도 아니었고, 직접 눈으로 살피고 나서야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요란한 청자켓. 그러니까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방향을 착각하고, 애먼 남의 자리 버클에 벨트를 끼워놓은 탓이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시네요. 라고 입 밖으로 내어 말하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이쯤 되면 자리를 옮겨도 되는 정당한 사유가 되지 않을까. 손 들고 컴플레인하면 안 될까? 하지만 여자는 앉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민정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여자를 불렀다.
"저기. 저기요."
그때야 제대로 쳐다본 옆모습이-
익숙했다.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울 정도의 화려한 이목구비. 잠시만, 이 얼굴 분명히 아는데?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일단 할 말을 했다. 제 자리 쪽에 벨트를 메신 거 같은데요. 그러자 여자는 당황스러운 투로 답했다. 내 정신 봐. 죄송해요.
특유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까지 들으니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주르륵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학교 책자에서 본 교복 모델. 교문 앞에서 본 메추리알 만치 조막만 한 얼굴. 급식실에서 처음 만나 이름 한 번 말하지 못하고 끝난 신입생 환영회. 무대에 올랐을 때 유독 눈에 띄는 긴 팔다리. 겨울을 떠올리게 하는 서늘한 인상과 긴 더플코트가 잘 어울리는 곧은 자세. 졸업식 날 복도에서 상훈과 팔짱을 끼고 칠렐레 팔렐레 가던 모습. 지금 신고 있는 파치먼트 컨버스의 원래 주인. 그리고 한밤중에 빈 교실에서 몰래 키스하다 들킬까 살떨렸던 기억- 은 여기서는 필요 없으니까 들어가고.
아무튼 결정적인 증거로, 이 정도 얼굴 크기를 가진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사람밖에 본 적 없다. 전국을 뒤져도 이런 만화 같은 비율을 가진 사람이 둘일 확률은 극히 적을 테니까. 그러면 논리적으로 이 여자는-
유지민.
혹시 유지민이 아닐까?
곧 모두가 기다린 기내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정의 관심은 밥보다 옆자리에 더 쏠려있었다. 99% 이상의 확률로 유지민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신원이 확실치 않은 이 산만한 여자는 아까부터 만화영화만 줄곧 보고 있었다. 토이스토리를 보다가, 갑자기 멈추고 알라딘을 보다가. 여자는 비프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새파란 지니로 분장한 윌 스미스를 꽤나 집중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의외로 디즈니 영화를 좋아하는 취향인가?
아무튼 이 요란한 청자켓을 유지민이라고 치고 말하자면, 다시 마주친 지민은 여전히 예뻤다. 그런데 독특한 얼굴을 왜 바로 못 알아본 건지는 의문이었다. 고등학생 무렵에 그나마 있었던 젖살이 쭉 빠져서일까, 가볍게 올라가 있던 눈썹산이 이제는 사라지고 일자눈썹이 되어서일까. 순둥순둥했던 인상은 좀 더 어른스럽게 변해있었다. 눈매도 더 날카로워진 것 같고, 메이크업도 좀 화려해진 것도 같고. 아니, 생각해보면 마지막으로 직접 얼굴을 본 게 2년 전이니까. 그 사이에 이 정도 변하는 건 당연한 건가?
민정은 지민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방금 시작한 액션영화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어디까지 봤더라. 스토리라인을 잠시 놓쳤지만 액션영화는 액션만 화려하면 장땡이다. 이제 막 펼쳐질 고공전투씬을 기대하며 보고 있었는데, 김이 확 샜다.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가 갑자기 뚝 끊어진 탓이다.
"...뭐야. 갑자기."
헤드폰을 벗었다 껴보고, 스크린도 몇 번 리셋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여러모로 정말 되는 일 없는 비행 초입이었다.
그때 옆에서 와인을 한 잔 시킨 지민이, 승무원에게 뭐라뭐라 작게 말했다. 그러자 승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민정에게 새 헤드폰을 건네주고 불량품을 가져갔다. 덥썩 받아들긴 했는데 순간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설마 방금 바꿔 달라고 대신 말해준 걸까. 대체 왜? 유지민에게 나는 그냥 모르는 사람 아닌가. 설마 급식실에서 그때 인사 한번 한 걸로 기억하나? 댄스부는 활동도 안 하고 그만뒀는데?
모처럼 시작된 고공전투씬에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시선을 돌려보았지만, 지민은 민정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연사로 셀카를 찍고 있었다. 심지어 진동모드도 아니어서 아주 요란하게 소리가 났다. 찰칵찰칵찰칵찰칵. 민정 뿐 아니라 건너편에 앉은 아저씨도 이게 뭔 소린가 하는 얼굴로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민은 사방에서 빤히 저를 쳐다보는 눈길을 의식했는지, 머쓱하게 핸드폰을 내려놓고 헛기침을 했다.
이 사람... 그냥 아무 생각 없는 거 아닐까?
민정은 이제 슬슬 물어보고 싶었다. 이 여자가 정말 제가 기억하는 유지민이 맞는지, 아닌지. 그래서 나름 용기를 내 목소리를 냈다. 저기, 저기요. 한 번 더 부르니 그제야 까만 눈동자가 놀란 듯 이쪽을 향했다. 이윽고 서로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얼핏 고등학교 시절 얼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H고 다닌 유지민 선배. 맞아요?"
"아, 맞아요. 저 아세요?"
과연 예상대로, 옆자리 여자는 유지민이 맞았다. 하지만 지민은 민정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우리가 만난 적 있냐고 물어보는 그 떫은 목소리가 조금 부끄러웠다. 이름을 알 거라고 기대 했던 건 아니지만. 만난 건 아니고, 한 번 마주친 적 있어요. 급식 먹다가 잠깐. 그러자 지민은 자신이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이라며 거듭 미안해했다.
"아니에요. 언니는 많이 유명했으니까."
"..."
"아마 기억 안 나실 거에요. 그럴 수도 있죠.”
괜히 물어보았다가 기분만 나빠지고 말았다. 민정은 나름 지민과 어찌어찌 계속 스쳐왔는데, 정작 지민은 제 존재를 오늘 처음 알았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도와준 건 도와준 거니까. 그나저나 아까는 고맙습니다. 민정은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툭 던지며 짧은 대화를 마쳤다.
여행 일정이나 다시 좀 볼까. 어차피 영화도 집중이 안 되는데. 슬슬 좀이 쑤셨던 민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을 열었다. 열자마자 승무원과 함께 열심히 구겨넣은 백팩이 거의 앞으로 쏟아질 듯 했다. 짐이 머리에 부딪힐까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혼자 낑낑대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 지민은 굳이 일어나서는 노트북을 꺼내는 동안 백팩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잡아주었다.
고맙긴 한데. 친절이 과하면 부담만 된다고 누가 그랬더라. 아무튼 그게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안 잡아주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기내 조명이 차례대로 소등되고 있었다.
Kim Min Jeong.
민정은 화면보호기에 대문짝만하게 뜬 영문 이름 밑에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kmj_010101! 나름 특수문자도 하나 들어가긴 했지만, 유치원생도 뚫을 수 있는 수준의 암호였다. 01년 1월 1일생, 김민정. 몇몇 웹사이트에서는 같은 숫자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뺀찌를 먹기도 하는 불운의 생일이기도 했다.
화면보호기가 풀리자 곧 지극히 익숙한 풍경이 나왔다. 영롱하고 푸르른 오로라 사진은 몇개월 째 바탕화면으로 설정된 채였다. 정작 이 사진 때문에 아이슬란드에 대한 기대치만 한껏 높아졌다. 지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이것도 누군가 포토샵으로 만진 결과물이 아닐까 싶은데. 수상한 사진을 보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버릇을 고쳤으면 싶지만, 타고난 성격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정은 한쪽 턱을 괸 채로 어젯밤 겨우 정리를 마친 폴더를 클릭했다. '북유럽여행'이라는 단출한 폴더 안에는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고 아이슬란드까지- 무려 5개의 나라를 거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대장정의 일정표가 들어있었다.
잠시만. 근데 이거 일정이 왜 이래. 다시 보니 과거의 제가 잡아놓은 토나오는 극악의 스케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핀란드 시골에 가는 야간열차는 안 무서울까? 열차는 2인 1실이라는데, 이상한 사람이랑 룸메가 되면 어떻게 하지. 개 썰매 하나 타겠다고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그리고 코펜하겐은 왜 딱 1박만 잡아놓은 건데. 이럴 거면 하루종일 배를 타고 이동하는 이유가 뭐야? 안 그래도 그 크루즈는 술 취한 사람들 때문에 밤에 아주 난장판이라는데, 꼼짝없이 열 몇 시간을 방에 갇혀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예약할 땐 몰랐는데 이거 완전히 몸만 고생하는 일정이잖아. 아무리 해외여행 경험이 없어도 그렇지, 과거의 김민정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북유럽 여행 하나 봐."
한참 패닉에 빠져있던 민정은 옆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정작 틀어놓은 알라딘은 안 보고, 지민은 말똥말똥하고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남의 여행 일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다시 짤막한 대화가 이어졌다. 네, 한 달 정도요. 꽤 길게 가네.
"어디야, 여기는?"
"아이슬란드요."
"와, 예쁘다-"
선배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오로라. 민정이 꾸역꾸역 여행을 온 건,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궁금해서도 있었다. 그걸 눈에 담고 돌아오면 과거의 기억을 미련없이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무튼 민정은 지진부진했던 생활에서 벗어나 지금 목적을 달성하기 직전까지 와 있었다. 번지점프로 친다면 줄까지 다 매고, 꼭대기에 벌벌 떨며 올라선 꼴이었다.
"오로라 보러 가요.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라."
사람이 옛 추억을 회상하며 나름 감상에 젖어있는 와중에- 지민은 듣지도 않고 혼자서 뭔가를 중얼댔다. 북극여우. 그래, 북극여우를 닮았어.
"네?"
"아, 아니야. 혼잣말."
뭐야? 뭐라는 거야.
지민은 최종 목적지가 헬싱키가 아닌 런던이라고 했다. 이유는 2년간 사귄 남자친구를 보기 위해서. 아마 상훈과 헤어지고 만난 사람이겠거니 짐작하며, 흥미는 전혀 없었지만 일단 끄덕끄덕 듣는 척을 했다. 지민은 한동안 자기 연애사를 풀어놓은 것 치고, 정작 런던보다 북유럽에 더 관심을 보이며 연신 부럽단 말을 중얼거렸다.
"아무튼 좋겠다, 북유럽 여행이라니."
"..."
"오로라를 직접 보면 진짜 이 사진처럼 예쁠까?"
"전문 사진작가가 찍은 거니까... 솔직히 이렇게 화려하진 않겠죠."
"오히려 반대 아닐까?"
"반대?"
"사진에 이 정도밖에 담기지 못한 걸 수도 있어."
"생각지도 못한 긍정적인 시각이네요."
"너가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거 아니고?"
"간다고 다 보는 건 아니니까. 오로라를 보는 건 완전 운이래요."
"버킷리스트라면서? 이왕 가는 거 좋게 생각해."
순전 운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로라 헌팅, 즉 오로라를 사냥하러 간다고들 하니까. 오로라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모두 필드에 나선 사냥꾼인 것이다. 누구도 결과는 알 수 없다. 민정 또한 1주일이나 아이슬란드에 죽치고 있는다고 해서 오로라 사냥에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기대는 안 하려고요. 어쩌면 못 볼 수도 있고."
"걱정 마. 꼭 볼 수 있을 거야."
"..."
"그리고 내 말대로, 두 눈으로 보는 게 사진보다 훨씬 예쁠지도 모르잖아?"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위로였지만, 민정은 지민이 조곤조곤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실은 계속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걱정 말라고, 이 여행을 다녀와도 괜찮을 거라고.
"그런데, 혼자 가는 거야?"
혼자 간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지민은 대단하다며 칭찬을 했다. 어차피 언니도 이제 런던에서 한 달 혼자 지내게 된 거잖아요. 사실을 여과없이 말해주니,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은 듯 지민의 어깨가 축 내려갔다. 맞네. 그렇긴 하지...
"진짜 갑작스럽다니까."
"..."
"남자친구 말고는 런던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나돈데. 비행기에서 내리면 이렇게 말 나눌 사람조차 없는데.
민정은 휴학하고 몇 개월 죽도록 알바한 게 아까워서 여행을 온 거라고, 지민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생각지 못하게 사적인 대화가 길어지자 묻어두었던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은둔자 처럼 지내다가 막 나온 참이기도 했고, 누군가와 이별여행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하는 게 처음이라 조금 흥분한 것도 있었다. 나름대로 정제해서 말한다고 했는데 불필요한 말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원래부터 혼자 갈 생각은 없었어요."
민정은 지금 혼자였다. 혼자 시작한 여행이니 계속 혼자서 지내야 한다. 갑자기 헤드폰 소리가 안 나와도, 선반에서 무거운 백팩을 꺼낼 때도. 방금이야 지민이 도와주었지만 앞으로 닥칠 문제들은 이제 스스로 해결할 몫이었다. 심지어 이렇게 멀리 온 게 처음이라 자각하니 더 겁이 났다. 낯선 곳에 툭 떨어지면 무슨 돌발상황이 더 생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어쩌지, 이제 곁에 아무도 없을 텐데.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한 달동안 혼자 어떻게 지내지. 아이슬란드에 가기 전에 갑자기 다 때려치우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어쩌지. 과연 번지점프 줄을 제대로 맨 게 맞을까? 이대로 뛰어내려도 될까? 사실 지금 좀 많이 쫄리는 상태인데. 만에 하나 오로라를 못 보고 터덜터덜 귀국하면, 그다음에는?
즐기려고 온 여행에서 무섭다는 생각부터 들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솔직한 심경은 그랬다. 어쨌든 지민은 남자친구의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인해 한 달의 공백이 생긴 셈이고, 북유럽 여행도 마침 딱 한 달 남짓이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헬싱키로 가는 비행기 옆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4년 전 처음으로 마주친 유지민은 돌고 돌아 이제야 김민정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 우연을 계속 이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같이 안 갈래요?"
"어?"
"아까 보니까, 영어 잘 하던데요."
"그러니까 같이 한 달동안... 여행을 하자는 거야?"
"시간 붕 떴다고 했잖아요. 한 달이면 기간도 딱 맞고요."
제 입으로 직접 말했지만 괴상한 이유긴 했다. 누가 영어 잘한다는 이유로, 잘 모르는 옆 사람을 여행 파티원으로 끼워 넣냐고. 갑작스러운 제안을 들은 지민은 꽤나 당황했는지 입만 벌린 채 그렇긴 한데... 하고 중얼거렸다.
“한번 생각해보고, 관심 있으면 비행기 내릴 때 알려줘요.”
어쩐지 곧장 거절의 말을 듣게 될 것 같아, 민정은 도망치는 심경으로 다시 영화를 켰다. 지민의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애써 무시하려고 부러 헤드폰의 볼륨을 거의 최대치로 올렸다. 도중에 멈췄던 영화에서는 제작비를 갈아넣어 만들었을 법한 대규모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잠자코 화면만 보고 있자 지민이 물끄러미 이쪽을 보다가 다시 헤드폰을 꼈다. 때마침 옆 스크린에서는 알라딘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익숙한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알라딘이 쟈스민에게 손을 내밀고,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 직전의 로맨틱한 순간이.
- Do you trust me?
- What did you say?
- Do you trust me?
- ...Yes.
쟈스민은 주저하다가 알라딘의 손을 잡았다. 양탄자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 순간 민정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노래를 불렀다. 지금 지민의 헤드폰 속에 울려 퍼지고 있을, 감미로운 멜로디를 떠올리며.
I can show you the world
shining, shimmering, splendid
나는 당신에게 눈부시고 아른아른 빛나는,
찬란한 세상을 보여줄 수 있어요
Tell me, princess,
now when did you last Let your heart decide
말해보세요, 공주님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원하는 선택을 한 게 언제였는지
하지만 즐거운 드라이브를 마치고 쟈스민이 다시 왕국으로 돌아온 순간, 지민은 볼 걸 다 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만 이내 화면을 꺼버렸다. 아쉬운 건 오히려 민정이었다. 노래방에서 열창을 하고 있는데 누가 취소하는 바람에 완곡을 못하고 툭 끊어진 느낌이라고 할까. 남은 시간 영화를 보지 않고 잘 생각인지, 등받이에 천천히 머리를 기댄 지민이 눈을 감았다.
기내는 아주 고요했다. 비행기가 고도를 높일 수록 귀가 멍했다. 민정은 두터운 헤드폰을 벗고 몇 번 입을 크게 벌렸다 닫기를 반복했다. 지민은 그새 잠이 들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래가 끊긴 게 꼭 아까 헤드폰이 망가진 순간처럼 못내 아쉬워서, 입 모양으로만 작게 뒷부분을 이어불렀다.
비록 눈앞의 영화에서는 피가 낭자하고 연쇄폭탄이 터지고 있었지만, 누군가와 함께 아름다운 아그라바의 사막 위를 날아가는 상상을 하면서.
I can open your eyes
Take you wonder by wonder
당신의 눈을 뜨게 해줄게요
놀라운 곳들로 당신을 데려갈 거예요
Over, sideways and under
On a magic carpet ride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서
위로, 옆으로, 아래로
꽤나 로맨틱한 구애의 가사였다. 다만 공교롭게도 민정은 마법의 양탄자가 없었다. 거대한 고체 비행기에서 비싼 기름을 낭비하며 하늘을 나는 주제에, 양탄자 타고 드라이브 하자는 노래를 부르는 꼴이 좀 웃기긴 했다. 평소 로맨스 영화라면 심드렁한 민정이었는데도 마구 환상을 부추기는 디즈니식 러브송을 부르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는 램프의 지니 대신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여행을 마친 스물한 살 김민정의 삶은 지금보다 조금은 나아져 있을까?
글쎄. 지민의 말처럼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지금의 민정으로서는 답하기 영 어려운 물음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재생되던 밤하늘 아래 오아시스는 더이상 낭만적이지 않고 외롭게만 느껴졌다. 현실을 직시하자면, 김민정은 마법의 양탄자도, 귀여운 원숭이 친구도, 램프의 지니도 없는 외톨이 알라딘이었으니까.
이건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잖아.
제일 중요한 쟈스민은 어디 있는데?
그때 오른쪽 어깨에 툭, 무게감이 느껴졌다. 어깨 끝자락에 닿은 건 지민의 머리였다. 오늘 대체 몇 번을 방해할 건데요. 간만에 디즈니 만화에 감정 몰입 중이었단 말야. 민정은 차마 말로는 못 내뱉고 힘이 빠진 채 제 어깨에 기댄 옆통수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고개가 꾸벅꾸벅 인사 하듯 자꾸만 앞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목도 길어서 더 불안하다. 이러다 곧 휘청일 것만 같아서, 민정은 지민의 이마에 살짝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으... 진짜."
지민은 비몽사몽 하면서도 얼굴에 손이 닿자 무의식중에 어, 미안... 하며 잠꼬대를 내뱉었다. 이 상황에서도 꿋꿋하고 착실하게 사과를 하는 건 뭘까. 민정은 그런 지민을 게슴츠레하게 쳐다보며 궁시렁댔다.
"볼수록 좀 이상한 사람이야."
"..."
"뭘 자꾸 미안하다고 해요?"
"..."
"누구한테 사과하는지는 알고 있나 몰라..."
대화가 될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제 자리로 올려준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기다란 목이 한 번 더 어깨에 스르륵 떨어졌다.
정말이지. 이렇게 머리를 못 가누는 사람이 옆자리에 앉을 줄 알았으면 기내용 목베개라도 가져왔을 텐데. 잠꼬대를 하는 걸 보니 깊이 잠든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민정은 지민이 그대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눈이 부실 텐데 영화를 꺼 줄까? 잠시 고민하던 민정은 정면의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 속 도시는 그새 총격전의 잔재만 남아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스토리는 둘째치고 액션조차 하나도 못 봤는데, 벌써 장엄한 엔딩 크레딧이 두둥 하고 나오고 있었다. 이럴 거면 기껏 액션영화를 고른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언니 때문에 하이라이트를 다 놓쳤잖아요."
민정은 작게 투정을 하고는 스크린을 껐다. 두 사람의 주변이 더 깜깜하고 적막하게 변했다. 누구라도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어둠이었다. 고도가 올라갈 수록 습도가 낮아진 탓일까, 막 비행기를 탔을 때보다 눈코입이 훨씬 건조하게 느껴졌다. 때마침 지민도 목이 텁텁했는지 인상을 쓴 채 작게 마른기침을 몇 번 콜록댔다.
머리 위에서 바람이 너무 곧장 내려오는 거 아냐? 자켓도 안 입고 자는 게 추워 보이는데. 민정은 팔을 뻗어 두 좌석의 에어컨 바람세기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이내 기침이 점차 멎더니 다시 안정을 찾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민정은 손으로 제 뺨을 톡톡 만져보았다. 바람은 어떻게든 막았지만 여전히 건조한 공기에 피부가 땅땅했다. 아그라바의 사막은 비행기 안보다 더 건조할까. 알라딘이랑 쟈스민 피부는 괜찮을까. 실은 사막에서 양탄자를 타고 날면 모래바람 맞느라 눈도 못 뜨지 않을까. 난 사막은 못 가겠네. 뭐 이런 아무래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퍽.
그때 누군가 종아리를 걷어차며 대차게 시비를 걸었다. 무심코 앓는 소리가 나왔다. 민정은 정통으로 맞은 다리뼈를 부여잡고 좁은 자리에서 무릎을 동동 굴렀다. 하필이면 저런 무식한 워커를 신고 와서는.
"진짜... 잠버릇 한 번 사납네."
틈이 없는 촘촘한 좌석 간격은 옆자리 분에게 너무 비좁은 모양이었다. 지민은 발길질을 한 후에도 허리가 불편한지 조금씩 몸을 뒤척였다. 민정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반대편 팔걸이를 찾았다. 앞부분에 톡 튀어나와 있는 좌석 등받이 버튼이 만져졌다. 조심조심 버튼을 누르자 지민의 좌석이 미세하게 뒤로 넘어갔다.
의자가 한쪽만 뒤로 젖혀지면 오히려 기댄 목이 불편하겠다 싶어, 민정은 동시에 제 것도 같은 기울기로 맞추었다. 그렇게 조금씩 두 의자를 번갈아 가며 뒤로 제끼고 나니 등에 느껴지는 부담이 훨씬 덜했다.
진작 이렇게 해줄 걸.
이름도 기억 못해준 사람을 위해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속으로 제 자신에게 투덜거리며 민정이 발을 쭉 뻗었다. 편하게 자라고 의자까지 눕혀줬더니, 지민은 아예 몸을 옆으로 비틀고 상체를 기울여왔다. 눈 앞으로 흘러내린 앞머리가 답답한지 이따금씩 고개를 저었다. 민정은 살며시 손을 뻗어 지민의 머리를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동그란 귀에 손이 닿을 때마다 깊게 내려간 속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민정이 머리를 마저 넘겨주며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유지민씨.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요."
"..."
"나도 지금 언니 때문에 좀 졸리기 시작하는데..."
"..."
"어쩌면 우리 머리 기대고 잘지도 몰라요."
그냥, 나중에 눈 떴을 때 놀라지 말라는 소리에요. 끈덕지게 말을 걸어도 지민은 새근거리는 숨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해 놓고도 부끄러웠다. 나지막한 숨소리가 귓가를 울릴 때마다 건조한 공기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열이 올랐다.
"난 분명 말했어."
"..."
"아무튼 잘 자요."
그러자 으응, 하고 작게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깬 걸까? 조마조마하며 옆을 보는데, 순간 가만히 있던 지민의 팔이 가슴께까지 올라오더니 이내 목덜미를 감아왔다. 꿈속에서 뭐라도 껴안고 있는 건가. 민정은 잠버릇이 고약한 주인에게 봉변당한 곰 인형이 된 기분으로 눈만 깜빡였다.
"남의 어깨에서 너무 뒤척이는 거 아니야...?"
"...미안."
잠결에도 힘없이 사과하는 목소리가 왠지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사과는 이제 그만 하고 얼른 자."
추억이 뒤섞인 향수 냄새는 익숙해진 탓인지 더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마법의 양탄자- 가 아닌 단단한 강철 복합재로 만들어진 비행기가 무심하게 고도를 높였다. 민정은 몇 번이고 부르다 끊긴 노래를 머릿속으로 따라부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But when I'm way up here,
하지만 이렇게 높이 올라오니
It's crystal clear
모든 게 분명해져요
That now I'm in a whole new world with you
내가 당신과 완전히 새로운 곳에 있다는 사실이
그 밤, 아주 짧은 꿈을 꾸었다.
눈앞에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발밑에는 사막이 아니라 낯선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순식간에 다른 스카이라인이 몇 번이고 흘러지나갔다. 풍경을 구경할 틈도 없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물길을 따라갔다. 곧 불빛이 점차 사라지고 드넓은 바다가 나왔다. 한참 구름을 가르고 날아가자 저 멀리 새하얀 눈밭이 이어지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겨울일 것만 같은 눈부신 땅. 그 위로 꿈에 그리던 오로라가 펼쳐져 있었다. 줄곧 보아온 사진보다도 훨씬 더 선명한 빛을 반짝이는, 짙푸른 오로라가.
세찬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동안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낯선 모험이 두렵지도 않았다. 롤러코스터보다 더 신나는 드라이브 내내, 민정은 다정한 누군가와 어깨를 맞댄 채였다. 그건 아마도 쟈스민이었을까? 새까만 머리카락을 흩날리던 모습만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꽤나 달콤한 야간비행이었다.
매 순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가능하면 영영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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